이사야 기독교 종말의 완전 역사 - 사32:1~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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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의 역사라는 것은 지상 통치의 역사를 완전 역사라 하는 것이다. 이날까지의 역사는 지상 통치를 이루기 위한 목적에서 그리스도의 보혈로 세계적인 민족 중에 택한 자를 찾으시는 데 불과한 역사이지만 종말의 완전 역사는 의로 통치하는 시대를 이루는 것을 기독교 종말의 역사라는 것이다. 완전 역사라는 것은 사람을 억지로 구속시키는 것으로써가 아니고 인력으로써 할 수 없는 것을 이루어주는 것을 뜻한다.
1. 환경에 지배를 받지 않는 역사다 (1~2)
(사32:1) 보라 장차 한 왕이 의로 통치할 것이요 방백들이 공평으로 정사할 것이며
(사32:2) 또 그 사람은 광풍을 피하는 곳, 폭우를 가리우는 곳 같을 것이며 마른 땅에 냇물 같을 것이며 곤비한 땅에 큰 바위 그늘 같으리니
아무리 광풍과 폭풍이 불어오고 아무리 메마르고 곤핍한 일이 온다 하여도 거기에서 피해를 당치 않고 나가는 역사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어려운 환경이 오게 하는 것도 택한 자에게 더 좋은 것을 주기 위한 목적이니 좋은 것을 받을 수 있는 자리는 인력으로써 당할 수 없는 일이 올 때라고 본다.
이것은 하나님의 모략적인 방법이니 어려운 풍파가 일어나는 것은 당신의 백성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게 하기 위한 방법이다. 인간이라는 것은 어려운 난관 속에서 하나님의 역사라는 것이 무엇이라는 것을 맛보게 되므로 영원한 왕국에 들어갈 수 있는 길이 있기 때문이다.
주의 인도하는 길은 어려운 일이 없게 하는 것이 아니요, 광풍같이 폭풍같이 불어오는 환난에서 피할 길이 있고 아무리 메마른 땅에도 만족히 마실 물이 있게 하고 곤핍한 땅에서도 새로워지게 하는 힘이 있으므로 진정한 신의 능력을 체험한 자만으로 새로운 왕국을 이루는 것이 하나님의 선한 방법이기 때문이다.
2. 보고 듣는 자에게 만족을 준다 (3)
(사32:3) 보는 자의 눈이 감기지 아니할 것이요 듣는 자의 귀가 기울어질 것이며
언제나 완전이라는 것은 보고 들을수록 만족함을 준다. 완전치 못한 것은 처음에는 좋게 보이나 자세히 보면 볼 것이 없고 처음에는 듣고 싶으나 자세히 들을수록 더 들을 것이 없는 것이지만 완전이라는 것은 처음 보는 것보다 볼수록 더 볼 것이 있고 들을수록 더 깨달아지는 것을 기독교의 종말의 완전한 진리라는 것이다.
금일에 기독교가 소위 선교 국가라는 나라들이 모이는 데 힘을 잃고 주일날 낮 예배만 보고는 다시 모이지를 않는다는 것은 강단에서 완전한 진리를 가르치지 못하는 일이 있게 되는 동시에 들으나 마나 하다는 싫증을 낼 때에 소위 세속주의라는 신학까지 나오게 된다. 우리는 이때에 들을수록 볼수록 은혜가 되고 만족해지는 역사가 없다면 교회는 이 시대에 필요 없는 기관이 되고 말 것이다.
그러므로 계시록에 읽고 듣고 지키는 자는 복 있다는 것은 기독교의 완전 역사를 뜻한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그 시대 사람에게 완전한 것을 주는 것이니 지금 과학 문명을 자랑하는 인간들에게 더욱 만족을 주는 진리 운동이 아름다운 소식이라는 것이다.
3. 조급한 마음에 지식을 준다 (4상반절)
(사32:4) 조급한 자의 마음이 지식을 깨닫고 어눌한 자의 혀가 민첩하여 말을 분명히 할 것이라
사람이라는 것은 공연히 마음이 조급해질 적에 큰 과오를 범하게 된다. 조급은 마귀 시험을 받는 일에 문을 열어주는 일이다. 에덴동산은 아담 하와가 타락한 동기가 간교한 뱀의 말을 듣고 마음이 조급해지는 시험을 받아 하나님 앞에 물어본 일도 없이 선악과를 먹게 되므로 인류 타락의 시발점이 되었다. 기독교의 신앙심이라는 것은 무조건 무슨 일이나 급하게 서두는 것은 언제나 마귀 올무에 걸리는 행동이라고 보게 된다.
오늘의 기독교가 과학 문명이 최고도로 발달할 때에 완전한 진리의 지식이 없는 인간들이 과학만능을 부르짖는 마귀 소리에 미혹을 받게 된다. 금일에 완전한 신앙 지식을 가진 자라면 이 시대를 바로 분별하는 동시에 시대적인 진리 지식에 입각하여 마음에 조급이 없는 완전한 인격을 소유한 성도의 생활에서 시국 난제를 해결할 지식을 성서에서 완전히 찾게 되는 일을 완전 역사라 하는 것이다.
4. 말을 분명히 하는 자가 된다 (4하반절)
(사32:4) 조급한 자의 마음이 지식을 깨닫고 어눌한 자의 혀가 민첩하여 말을 분명히 할 것이라
오늘에 기독교 강단에서 말을 분명히 하지 못하므로 오히려 혼란을 일으키고 말하지 않은 것보다 못한 역효과를 주는 일이 너무나 많다. 설교가 영을 살리는지 죽이는지를 모르고 무조건 떠든다는 것은 예배를 망치는 설교가 될 것이다. 분명한 말을 못하는 자로 강단 생활은 자신조차 흑암에 빠지는 일이 된다(사8:20).
하나님의 말씀은 설교자로서 분명히 말할 수 있는 합리적인 변론이 구비된 글이다. 어떤 자들이 하나님 말씀은 아무렇게 각각 해석할 탓이라 하는 것은 하나님의 교회를 망치는 말이라고 본다. 사45:19을 보면 “나는 흑암한 곳에서 은밀히 말하지 않았으며 야곱 자손에게 너희가 나를 헛되이 찾으라 이르지 아니하였노라 나 여호와는 의를 말하고 정직을 고하느니라”고 말씀하셨다. 만일 하나님께서 당신의 종들이 분명히 말할 진리를 주지 않고 무조건 나가서 증거하라고 한다면 우리는 그런 하나님의 종이 될 필요가 없을 것이다.
하나님의 사람은 분명한 말을 못하면 완전한 인격을 가진 자가 아닐 것이다. 그러므로 금일에 기독교의 완전 역사는 신자로서 분명한 말을 하게 될 때에 마귀의 흑암은 물러가고 천사는 같이하므로 백전백승의 용사의 걸음을 걷게 될 것이다.
결 론
우리 인생의 참된 행복의 세계를 이루는 것은 과학을 초월한 하나님의 완전 역사로만이 완전한 인격을 찾게 되는 동시에 완전한 열매를 이루는 자로서 새로운 의의 통치 시대를 이루는 것을 기독교 종말의 완전 역사라는 것이다.
70년 7월호 <설교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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