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기도 생활에 있어야 될 원칙 - 마7:1~1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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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 생활에는 원칙을 떠날 때에 그 기도는 아무런 열매가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기도는 진리의 하나님께 상달되는 일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기도를 받으시기를 원하시고 더 좋은 것을 주고 싶은 것이 하나님의 사랑의 심정이기 때문이다.
이제 기도 생활에 없어서는 안 될 3가지 원칙을 본문을 통하여 말한다.
1. 마음의 원칙 (1~6)
(마7:1)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마7:2) 너희의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
(마7:3) 어찌하여 형제의 눈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마7:4) 보라 네 눈속에 들보가 있는데 어찌하여 형제에게 말하기를 나로 네 눈속에 있는 티를 빼게 하라 하겠느냐
(마7:5) 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속에서 들보를 빼어라 그 후에야 밝히 보고 형제의 눈속에서 티를 빼리라
(마7:6)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며 너희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 저희가 그것을 발로 밟고 돌이켜 너희를 찢어 상할까 염려하라
마음이라는 것은 하나님과 교통하는 문이요, 제단의 위치라고 본다. 기도의 사람이 마음에 죄가 있다면 도저히 하나님과 교통할 수가 없다. 그러므로 마음속에 있는 들보를 먼저 빼라고 했던 것이다. 어떤 사람이 자기 죄를 숨기고 남의 잘못을 판단한다면 이 사람은 하나님과 상대가 될 수가 없을 것이로되, 먼저 자기의 마음 가운데 숨은 죄를 회개하면서 형제를 대하는 사람은 하나님과 상대할 수 있는 마음의 위치를 가졌다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기도의 사람의 마음은 항상 자기 마음속에 숨어있는 들보와 같은 정욕을 버리고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만을 바라보는 마음의 터가 확정되어야 되는 것이다. 금일에 많은 사람이 기도를 하지만 기도의 열매가 나타난 일이 적은 것은 그 마음과 하나님과에 가까이 부딪쳐지는 위치에 있지 못한 원인이라고 보게 된다.
항상 하나님은 중심을 보시되 하나님께 은밀히 보시는 마음에 숨은 죄를 항상 통회하는 애통이 있는 마음에 여호와의 신은 응답의 역사를 나리시는 것이다.
2. 생활의 원칙 (7~12)
(마7:7)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마7:8) 구하는 이마다 얻을 것이요 찾는 이가 찾을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 열릴 것이니라
(마7:9) 너희 중에 누가 아들이 떡을 달라 하면 돌을 주며
(마7:10) 생선을 달라 하면 뱀을 줄 사람이 있겠느냐
(마7:11)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
(마7:12)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
기도는 실천의 생활이 있어야 한다. 아무리 중심에 원함이 있다 하여도 실천이 없는 생활이라면 기도는 응답이 있을 수 없다. 그러므로 구하라, 문을 두드리라, 찾으라 하는 말씀을 하셨다. 그러면 두드리고 찾는 목적이 자기를 위해서가 아니고 남을 대접하고자 하는 마음에서 움직이는 활동이 있어야 된다. 예를 든다면 나뭇가지가 진액을 받아서 열매를 맺는 것은 사람을 대접하는 열매가 되듯이, 우리가 기도하는 목적은 하나님이 사람을 살리고자 하는 일에 완전한 열매를 구해야만 될 것이다.
어떤 종이 기도할 때에 자기의 만족이나 영광을 목적했다면 그 사람에게는 있던 것도 다 빼앗기게 될 것이로되, 마음에 어떠하든지 형제를 살리는 열매를 구하는 종이라면 생각 밖에 더 좋은 것을 주시는 하나님이시란 것이다.
하나님께서 언제든지 택한 자에게 무엇을 주실 적에는 직접으로 주시는 것이 아니고 모든 종들을 통하여 주시는 것이니, 과거에 선지들이 기도하다가 묵시의 글을 쓰게 된 것은 억울한 사람에게 압박을 받고 배척을 받는 자리에서 그 사람들을 위하여 기도할 때에 뜻밖에 홀연히 묵시의 글이 나타나서 그 글을 기록하게 된 것이니, 이 글로 말미암아 많은 생명이 참된 진리를 찾게 되었고 새 시대의 영광을 누리게 되는 것을 생각할 때에 남을 대접하고자 하는 마음을 가진 종에게 묵시를 보여주기도 하시고 또한 그 말씀대로 역사하는 종들이 신약시대에 예수님을 비롯하여 사도들을 통하여 모든 성도가 하나같이 그들이 기록한 진리를 받으므로 하나같이 큰 구원의 축복을 받고 하나같이 새로운 시대에 왕권의 축복을 누릴 수 있는 왕국 반열이 이루어질 것은 어떤 사람이 감히 상상할 수 없는 하나님의 큰 축복이라고 보게 된다. 그러므로 본문에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 했던 것이다.
3. 노선의 원칙 (13~14)
(마7:13)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마7:14)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니라
우리의 신앙 노선에는 언제나 넓은 길과 좁은 길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넓은 길이라는 것은 세속화된 노선이요, 좁은 길은 성별된 생활에서 순교적인 노선이라고 보게 된다. 그러므로 세속화된 노선은 다수가 가는 것이요, 순교적인 노선에는 언제나 적은 수가 가는 것이니 주님께서 너희가 내 제자가 되려면 날마다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오라고 했고 부모나 형제나 처자를 나보다 더 사랑해도 내게 합당치 않다는 것은 좁은 길을 뜻한 것이다.
언제나 많은 사람이 기도하지만 기도의 응답을 받고 승리의 생활을 하는 자는 구약 때나 신약 때나 심히 소수의 사람이라는 것이 증명된다. 그러므로 좁은 길, 좁은 문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알아야 한다.
첫째 : 양심에서부터 신앙 지침에 획선이 바로 서야 한다.
예를 든다면, 태평양 바다를 건너가는 큰 기선은 지남침의 획선에 따라서 방향을 바로 움직여야 할 것이다. 우리는 물결치는 파도가 많은 세상에서 좁은 문, 좁은 길 같은 그 획선을 양심에서 바로 가져야만 하는 것이다. 이것이 없는 신앙이라면 파선된 배와 같다(딤전1:19~20). 하나님은 위대한 신이시요 가장 세밀한 신이시니 양심 속에 조그마한 티와 같은 것이라도 잘못된 획선을 가진다면 하나님은 응답의 역사를 하지 않기 때문이다.
둘째 : 싸우는 생활에서 가장 날카로운 말씀을 써야 한다.
만일 어떤 종이 말씀에 날카로운 칼이 없이 하나님 말씀을 아무렇게나 제 마음대로 이리저리 갖다 붙여 이용하는 사람이 된다면 그 사람은 밝은 진리 획선을 잡지 못한 자로서 자기도 죽고 대중을 죽이게 될 것이다.
셋째 : 분별력이 강해서 영적으로 멀리 내다보는 획선이 있어야 한다.
영계라는 것은 반드시 그 획선을 바로 찾지 못하면 얼마든지 혼란한 영계가 오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도 요한은 요일4:1에 영을 다 믿지 말고 오직 그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시험하라고 했던 것이다. 우리 영계 분별이라는 것은 먼저 그리스도께서 성령으로 잉태된 그 역사에서부터 금일에 우리에게 역사하는 그 영계의 획선이 있는 것이니, 언제나 성령은 하나님의 말씀이 이루어지기 위하여 역사하기 때문에 예수님이 마리아 몸에 잉태될 때부터 재림의 주를 맞이할 때까지 진리가 조금도 하나님의 말씀에서 혼선되지 않도록 역사하는 진리의 영이시다. 그러므로 영계를 분별할 때에 말씀의 획선을 바로 찾는 지식에서 성령을 통하여 이루어지는 역사를 바로 분별해서 나갈 수 있다.
결 론
하나님은 기도의 사람을 통하여 당신의 할 일을 알게도 하시고 행하게도 하신다. 그러므로 기도의 사람은 양심의 원칙, 생활의 원칙, 노선의 원칙을 바로 찾아야 열매 있는 생활이 있게 될 것이다.
70년 11월호 <설교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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