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양심이 성령 안에서 증거하는 종이 되자 - 롬9:1~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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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종은 양심과 성신의 역사가 함께하여야 될 것이다. 성신은 언제나 어떤 인격이나 학식이나 재능이나 의식을 따라서 움직이는 신이 아니고 양심을 보고 양심의 활동을 따라서 성령은 역사해주시는 것이다.
양심이 성령 안에서 증거하는 생활을 본문에서 배우기로 하자.
1. 그리스도 안에서 참말을 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1)
(롬9:1)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참말을 하고 거짓말을 아니하노라 내게 큰 근심이 있는 것과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는 것을 내 양심이 성령 안에서 나로 더불어 증거하노니
그리스도 안이라는 것은 그리스도의 참사랑 속에 들어가는 것을 말한다. 도덕도 거짓이 있을 수 있고 의식도 있을 수 있고 인간적인 혈통에도 거짓이 있을 수 있고 문학적인 신사라도 거짓이 있을 수 있고 과학적인 기술자에게도 거짓이 있을 수 있지만 그리스도 안에서는 있을 수 없다.
그리스도 안이라는 것은 교파 울타리 안보다도 한 교회 안보다도 정통 교리 체계 안보다도 신학적인 학설의 체계 범위 안보다도 좀 더 들어가서 있는 것이 그리스도 안이라는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는 참사랑밖에는 아무것도 없는 것이다. 참사랑이라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대신 죽으셨다는 것 외에는 있을 곳이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남을 살리되 그리스도의 참사랑만이 참된 생명을 줄 수 있는 것이니 이 사랑 안에는 형제를 위하여 내가 목숨을 바치고 싸워준다는 것 하나만이 충만해지는 것이다. 어떤 종이 자기의 위신이나 명예나 생활에 타격을 받는다고 하여서 불평을 둔다는 것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생활이 될 수가 없다. 그리스도 사랑 안에는 그 사랑을 받았으니 그 사랑 그대로 남에게 준다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있을 수 없다. 그러므로 14만 4천에 드는 종은 거짓이 없다고 말한 것이다.
우리는 남을 살리기 위하여 그 사람의 비밀을 지켜주는 데서는 아는 것을 모른다 할 수도 있고, 보고도 못 보았다 할 수 있고, 그 사람의 단점을 알고도 모른다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 밖의 거짓이라는 것은 그리스도 안에 있을 수가 없는 일이다.
2. 형제를 위하여 근심과 고통이 있는 마음을 가지게 된다 (2)
(롬9:1)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참말을 하고 거짓말을 아니하노라 내게 큰 근심이 있는 것과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는 것을 내 양심이 성령 안에서 나로 더불어 증거하노니
(롬9:2) (1절에 포함)
만일 하나님의 종이 자기의 어떤 욕망을 채우기 위해서 근심과 고통이 있다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지만, 형제를 위하여 근심하고 고통하는 마음으로 부르짖는 기도와 전도는 열매 있는 종의 생활이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예수님이 심령 고통을 받은 것은 우리를 위한 고통이요, 지금도 하나님 보좌 우편에서 쉬지 못하고 기도하는 것도 우리를 위한 애달픈 기도일 것이다.
그렇다면 목회자가 양 떼를 위하여 마음에 근심하고 남의 시련을 나의 시련보다도 더 근심하고 남의 고통을 내가 당하는 고통보다도 더 안타까워하는 것이 있다면 이 종은 그리스도의 사랑이 격동하는 마음이라고 보게 된다. 양 떼가 주려도 목이 마르다 해도 목자의 마음에 근심이 없다면 그 목자는 삯을 위해서 있는 목자라고 보게 된다.
마음에 하나님의 양 떼를 내 몸같이 사랑하는 종은 형제를 위하여 근심과 고통을 하는 종이라고 보게 된다. 자기 몸이 병들 때 근심을 하지 않을 자가 어디 있으며 자기 몸이 괴로울 때 고통하지 않을 자가 어디 있으리요. 이와 같이 사랑하는 형제들의 딱한 사정을 볼 때에 근심하며 기도하고 가슴을 두드려가며 기도하는 자에게 응답이 오는 것이다. 히스기야가 자기 백성을 위하여 옷을 찢고 성전에 올라가 울며 기도할 때 북방 앗수르가 무너졌던 것이다.
금일에 와서 아시아의 넓은 대륙을 공산당이 집어삼키되 교회를 짓밟고 들어와 다 황폐화된 금일에 남한 땅 작은 모퉁이에 있는 종으로서 이 비참한 일을 보고도 기지개 켜며 잠자기를 좋아하며 오락과 연락에 도취가 된 자라면 그 양심은 성령 안에 있는 양심이라고 할 수 없다. 왜냐하면 사도 바울이 마음에 이스라엘을 위하여 큰 근심과 고통이 있었다는 것을 보아도 알 수 있는 일이다.
3. 희생적인 소원이 있다 (3)
(롬9:3)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찌라도 원하는 바로라
그리스도께서 저주를 친히 담당하시면서 인간이 구원받기를 소원한 거와 같이 사도 바울은 자기가 저주를 받아도 자기 골육과 친척이 구원받기를 원했던 것이다. 참된 하나님의 종이라는 것은 자기를 위하는 것이 있다면 이것은 그리스도 일꾼의 정신이 아니다. 그러므로 기독교의 참된 사랑이라는 것은 자아를 희생하고 남을 살린다는 마음이 불탈 적에 그리스도의 능력은 십자가를 통하여 그 종에게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말씀하기를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않은 자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찾을 것이고 자기 목숨을 찾는 자는 잃을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인간을 살리기 위하여 독생자를 보내신 하나님과, 인간을 살리기 위하여 죽기까지 순종하신 예수님과, 인간을 살리기 위하여 우리에게 와서 항상 역사하는 성신과, 항상 인간을 살리기 위하여 괴로움을 극복하고 나가는 종과 합해짐으로써 왕국 건설 운동은 필연코 대승리를 보게 되는 것이다.
자기네 유대 교권을 내세우기 위하여 바울을 염병 같은 이단이라고 정죄하던 바리새교인들은 열매 없는 나무같이 찍힘을 당했고, 남을 살리기 위하여 자신이 저주를 받아도 마땅하다고 생각을 두고 복음을 전하던 그 역사는 세계를 정복하는 대확장을 이루는 동시에 필연코 승리의 왕국을 이루게 될 것이다.
우리들은 자아를 위하여 날뛰는 소극적인 사람이 되지 말고 자아를 희생하여 형제를 살린다는 사랑의 용사가 될 적에 진노의 날에 남은 종이 되어 새 시대를 왕권으로 정복하게 될 것이다.
결 론
인생의 가치라는 것은 옳은 일에 증거하는 자가 될 때에 옳은 사람이 되고 불의한 일에 증거하는 사람이 될 때에 불의한 자가 되는 것이다. 금일에 공산당은 허위 선전에 날뛰고 있지만 이것은 아무런 열매 없는 검불이 될 것이요, 참된 양심이 그리스도 안에서 증거하는 진리의 사람은 완전히 열매를 맺는 푸른 나무같이 될 것이다.
71년 1월호 <설교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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