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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로새서 그리스도인의 생활의 위력을 잃지 말자 - 골2:8~2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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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리스도인의 생활이라는 것은 인간의 모든 것을 초월한 생활이니 그리스도인이 그 위력을 상실할 때에 아무런 열매 없는 생활에 들어가게 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의 생활의 위력을 잃지 않으려면 다음과 같은 생활이 있어야 한다.



  1. 인간 철학을 초월한 데서 충만한 생활이 있어야 한다 (8~11)


(골2:8) 누가 철학과 헛된 속임수로 너희를 노략할까 주의하라 이것이 사람의 유전과 세상의 초등 학문을 좇음이요 그리스도를 좇음이 아니니라

(골2:9) 그 안에는 신성의 모든 충만이 육체로 거하시고

(골2:10) 너희도 그 안에서 충만하여졌으니 그는 모든 정사와 권세의 머리시라

(골2:11) 또 그 안에서 너희가 손으로 하지 아니한 할례를 받았으니 곧 육적 몸을 벗는 것이요 그리스도의 할례니라


  오늘날 기독교인의 큰 실패는 기독교 신앙 세계의 산 체험이 없이 인간 철학으로 신앙 세계를 움직여보려는 것이다. 이것은 조갑지로 바닷물을 되려는 사람과 같으니 인본주의적인 철학에 노략을 당할까 주의할 것이며 인간의 초등 학문인 철학적 세계를 넘어서서 그리스도 안에서 신성의 모든 충만한 것을 체험하여야 된다.

  그리스도인의 완전성은 인간 철학으로는 감히 그 세계를 도달할 수 없고, 육적의 몸을 벗어나서 신의 세계의 충만한 역사를 체험하는 단계로 들어가야만 그리스도인의 생활의 위력을 발휘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완전 승리를 이루셨으므로 그리스도인에게 승리의 역사로 인격을 완전히 개조시키는 일이 있게 된다. 이렇게 되므로 철학적 세계와는 거리가 먼 세계로 들어가게 되는데 이것을 그리스도인의 세계라는 것이다.

  오늘날 소위 신학자라 하는 자들이 철학을 초월한 신의 세계의 충만을 체험치 못하고 철학적 세계에 노략을 당한 상태에서 신학을 연구하는 자가 있다. 이것은 예를 들면 대학생을 앞에 놓고 강의할 사람이 소학교 학과를 가지고 연구하는 것이나 같다.



  2. 그리스도와 같이 사는 생활에서 율법을 초월한 생활이 있어야 한다 (12~17)


(골2:12) 너희가 세례로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한바 되고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그를 일으키신 하나님의 역사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 안에서 함께 일으키심을 받았느니라

(골2:13) 또 너희의 범죄와 육체의 무할례로 죽었던 너희를 하나님이 그와 함께 살리시고 우리에게 모든 죄를 사하시고

(골2:14) 우리를 거스리고 우리를 대적하는 의문에 쓴 증서를 도말하시고 제하여 버리사 십자가에 못 박으시고

(골2:15) 정사와 권세를 벗어버려 밝히 드러내시고 십자가로 승리하셨느니라

(골2:16) 그러므로 먹고 마시는 것과 절기나 월삭이나 안식일을 인하여 누구든지 너희를 폄론하지 못하게 하라

(골2:17) 이것들은 장래 일의 그림자이나 몸은 그리스도의 것이니라


  그리스도인의 생활이라는 것은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한 바가 되고 함께 일으킴을 받은 생활이다. 나라는 자체가 완전히 없어지고 그리스도의 것으로 이루어진 것은 하나님의 역사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진 것이니 율법을 따라서 행하는 역사가 아니고 율법에 대한 죄의 세력을 완전히 도말하고 십자가의 승리로 역사하는 것이다. 우리는 그 역사를 받았으므로 그림자가 되는 절기나 월삭이나 안식일을 인하여 누구든지 우리를 변론할 필요조차 없고, 율법과 율례를 십자가에서 도말하신 그리스도의 역사를 받음으로써 그리스도인의 생활의 위력이 되는 것이다.

  만일 어떤 사람이 마음에 역사가 없이 신앙생활을 한다면 이 사람은 아직까지 그리스도인의 생활이 아니요, 죄인의 생활이라고 본다. 과거에 죄를 진 인간들에게 몽학적인 교훈을 한 것이 율법과 계명이다. 우리는 죄인된 인격을 그대로 가지고 생활하는 것이 아니고 죄인된 인격은 장사한 바 되고 그리스도를 부활시킨 하나님의 역사가 우리를 지배하므로 그 역사 아래서 살게 되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위력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세례를 통하여 육의 사람을 완전히 벗어나 영의 사람으로 움직일 때에 과거에 받지 못하던 하나님의 역사를 받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생활의 위력이라는 것을 체험하여야만 될 것이다.



  3. 일부러 겸손한 자에게 지배를 받지 않는 생활이 있어야 한다 (18~19)


(골2:18) 누구든지 일부러 겸손함과 천사 숭배함을 인하여 너희 상을 빼앗지 못하게 하라 저가 그 본 것을 의지하여 그 육체의 마음을 좇아 헛되이 과장하고

(골2:19) 머리를 붙들지 아니하는지라 온 몸이 머리로 말미암아 마디와 힘줄로 공급함을 얻고 연합하여 하나님이 자라게 하심으로 자라느니라


  소위 인간 도덕적 겸손이라는 것은 일부러 겸손하게 태도를 취하는 데서 사람의 마음을 끄는 일도 있다. 그리스도인이 이것에 끌린다면 아무런 상을 받을 수 없이 되므로 자동적으로 영적은 메말라지는 것이다. 우리는 머리 되시는 예수님께로부터 항상 공급을 받아 연합될 때에 하나님의 역사로 나날이 자라나는 것이다. 이것을 그리스도인의 위력이라고 한다. 

  오늘날 교회의 지도자들이 사람에게 보이려고 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중심하는 것이 아니고 우상을 숭배하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항상 자라나게 하는 역사를 받는 사람은 그리스도의 사람으로 생활의 위력을 나타내게 될 것이다.



  4. 사람의 명한 것과 가르침을 따르지 않는 생활이 있어야 한다 (20~23)


(골2:20) 너희가 세상의 초등 학문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거든 어찌하여 세상에 사는 것과 같이 의문에 순종하느냐

(골2:21) 곧 붙잡지도 말고 맛보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하는 것이니

(골2:22) (이 모든 것은 쓰는대로 부패에 돌아 가리라) 사람의 명과 가르침을 좇느냐

(골2:23) 이런 것들은 자의적 숭배와 겸손과 몸을 괴롭게 하는데 지혜 있는 모양이나 오직 육체 좇는 것을 금하는데는 유익이 조금도 없느니라


  어떤 사람이 의식이나 필요 없는 숭배나 모양을 내려는 방면으로 치우칠 때에 성신의 역사는 일어나지 않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마6:1과 같이 사람에게 보이려고 하는 마음이 없고 하나님 중심에서만 그 역사를 받게 될 때에 그리스도인의 생활의 위력을 발휘하게 되는 것이다.



  결  론


  그리스도인의 생활의 위력이라는 것은 철학적이나 율례적이나 도덕적이나 인간의 어떤 숭배적인 것을 초월해야만 그리스도인의 생활의 위력을 나타낼 수 있는 것이다.



71년 10월호 <설교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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