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일서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 요일4:16~21 -
페이지 정보
본문
하나님은 스스로 계신 신이신 동시에 사랑의 신이시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당신의 사랑의 뜻을 만족히 채우기 위하여 천지 만물을 창조할 때부터 사랑을 목적하고 역사하신 것이다. 사랑이라는 것은 스스로 계신 하나님 외에는 가질 수가 없다. 왜냐하면 피조물 자체에는 남을 사랑할 만한 인격이 완전히 있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사랑의 역사에 끌려서 활동하는 것뿐이다. 천지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자연계를 움직이는 것도 사랑을 목적한 것이요, 영계를 움직이는 것도 사랑을 목적한 것이니 우리는 그 사랑 속에서 순종하여 씌워지는 도구가 될 것뿐이다.
이제 하나님의 사랑의 뜻을 이루는 데 있어서 다음과 같이 요소가 있는 것이다.
1. 사랑 안에 거하는 자를 만족케 하심 (16)
(요일4:16)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우리가 알고 믿었노니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 안에 거하시느니라
사람이라는 것은 하나님이 먼저 사랑해주시는 그 안에 순종만 하면 모든 것이 다 만족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왜냐하면 독생자를 보내서 십자가에 죽게 하고 이제 그 사랑 안에 들어오라고 죄인들을 부르는 것이니 누구든지 믿고 순종하며 그 안으로 들어갈 때에 하나님은 우리 안에 거하고 우리는 하나님 안에 거하는 만족한 생활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인생이라는 것은 조물주 하나님과 하나가 되는 것 외에는 만족한 것이 하나도 없다. 동물은 먹는 것으로 만족을 누릴 수 있으나 사람은 먹는 데 국한된 동물이 아니요 하나님이 거할 수 있는 인격을 가졌으므로 하나님 안에 안기는 생활이 있음으로만이 인생의 가치를 발휘하기도 하며 또는 하나님이 주시는 것을 만족히 누리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십자가의 의라는 것은 누구든지 사랑 안에 들어오는 사람은 만족함을 누리도록 해주는 것을 십자가 의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독생자를 주신 사랑의 십자가이니 그 안에서 무엇이든지 다 하나님께 받게 되기 때문이다.
2. 심판 날에 담대함을 주심 (17)
(요일4:17) 이로써 사랑이 우리에게 온전히 이룬 것은 우리로 심판날에 담대함을 가지게 하려 함이니 주의 어떠하심과 같이 우리도 세상에서 그러하니라
하나님의 심판이라는 것은 사랑의 법을 완성하는 오메가 역사이다. 사랑의 시작은 누구든지 아들을 믿으면 다 사랑 안으로 들어와서 만족을 얻게 하는 것이라면, 심판이라는 것은 사랑 안에 들어온 자로 새로운 왕국을 이루기 위한 종말적인 역사이니 사랑 안에서 이루어지는 나라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심판이라는 것은 사랑 안으로 들어오기를 기다리고 있는 하나님의 사랑을 믿지 않고 배반한 자를 다 없애는 것이 심판이다. 누구든지 죄가 있으므로 심판을 받는 것보다도 그 사랑을 믿지 않은 조건으로 심판을 받게 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것은 그 안에 들어오는 자를 온전하게 만들어 그 사람들로 하여금 심판 날에 담대함을 얻어 남은 자가 되게 하는 동시에 심판을 나리기 때문에 심판이라는 것은 오히려 온전하게 된 자를 더 사랑하는 시대로 옮겨놓기 위하여 심판하는 것이니 지금 이 세상은 사랑하는 자가 시련을 받고 억울함을 당하는 시대이지만 심판은 사랑하는 자로 완전한 평화의 왕국을 이루어서 영광의 복락을 누리게 하기 때문이다.
3. 두려움이 없게 하는 사랑 (18~21)
(요일4:18)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 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
(요일4:19)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
(요일4:20)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 하는 자니 보는바 그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가 보지 못하는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가 없느니라
(요일4:21) 우리가 이 계명을 주께 받았나니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또한 그 형제를 사랑할찌니라
인간은 죄를 지을 때부터 두려움이라는 것이 있게 되어 거기서 평화를 누리지 못하고 항상 인류 역사가 두려운 전쟁, 사망, 고통, 재앙으로 내려온 것뿐이다. 그러므로 두려움에 빠진 인생들을 두려움이 없는 자리로 옮겨놓는 것이 하나님의 완전한 사랑이라는 것이다(히2:14~15).
만일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사람이 공포심이 있다면 그 사람은 완전한 사랑에서 온전함을 이룬 인격이라고 볼 수 없다. 온전한 인격이라는 것은 두려움이 없이 형제를 사랑하며 죽음을 돌파하고 나가는 인격이다. 어떤 사람이 믿는다 하면서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참사랑의 인격을 갖지 못한 자라고 보게 된다.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것은 하나님 한 분만이 가지고 계신 것이 아니고 그 사랑을 인간에게 주시는 동시에 사람으로서 그 사랑 속에서 남을 사랑하는 자에게 하나님은 더 온전한 것을 주고자 하는 것이 하나님의 온전한 사랑이라는 것이다.
결 론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하는 것은 하나님께 있는 영생의 생명과 영광의 나라의 기업을 택한 자에게 주고자 하는 것인데 이것은 사람이 원하므로 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 자체가 사랑이시므로 하나님이 주고 싶은 소원을 이루어주는 것을 하나님의 사랑의 역사라는 것이다. 이 하나님의 사랑에는 형식과 의식이 필요 없고 하나님 자체가 사랑이시므로 하나님 마음에 사랑이 불타는 심정으로 자기 안에 있는 모든 것을 주고 싶은 그 마음을 만족케 하는 일을 하기 위하여 독생자를 보내어 대신 죽게 한 것이다.
이제 그 십자가를 통하여 사랑이 되시는 하나님의 뜻은 다 이루어지되 하나님과 동거할 수 있는 인격을 만들어 영원히 같이 영광을 누리도록 하겠다는 것이 하나님의 사랑의 본질인 동시에 완전한 역사라는 것이다.
70년 10월호 <설교편>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