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위적인 평화는 인위적으로 끝나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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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평화를 위하여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을 믿는다. 어찌하여 하나님께서 평화를 위하여 아들을 죽게 하시고, 아들은 죽기까지 순종하셨는가 하는 진리를 바로 아는 데서부터 참된 평화의 역사가 무엇인지를 체험하게 된다. 개인의 마음속 평화도 인위적으로 이룰 수가 없는데, 세계적인 평화를 인위적으로 이룬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실 때에 가장 간교한 뱀을 내어 사람을 꾀이도록 하여 원수가 생기도록 하셨던 것이다. 이것은 원수와 타협함으로써 평화를 이루라는 것이 목적이 아니요, 그 원수를 이김으로써 평화를 이루라는 것이 목적이다. 이렇게 되므로 이루어진 것을 참된 평화의 왕국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죄의 종이 된 생활에서 평화를 얻을 수 없는 인생들에게 참된 평화를 주기 위해서 하나님은 역사하셨던 것이다. 인간의 죄와 원수를 없이하는 방법을 세우기 전에는 완전한 평화가 있을 수 없으므로 하나님께서 독생자를 십자가에 죽게 하시고 승리의 부활을 하게 하심으로써 심령 중생의 평화를 얻게 하셨다. 그러므로 중생의 평화라는 것은 중생의 체험을 받는 자에게만 있게 되는 것이다. 기독교 신자라면 누구든지 다 숨은 보화같이 마음의 평화를 보존하고 있을 것을 믿는다.
그러나 하나님의 역사라는 것은 개인적인 중심 평화로 끝을 맺는 것이 아니고, 중심 평화가 시작이 되면 세계 평화로 끝을 맺는 것이다. 중심 평화는 인위적인 도덕이나 수양이나 어떤 인간의 화려한 생활로써 이룰 수 없고, 오직 독생자의 승리의 역사로만 이루어진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세계 평화를 일으킬 이도 예수님밖에는 없을 것이다.
오늘날 인위적인 평화를 위하여 영웅적인 행동을 한 것같이 보이는 일도 있지만, 하나님 편에서 보실 때에는 오히려 어리석은 음녀와 같은 일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붉은 용, 붉은 짐승의 세력을 완전히 없애므로 평화 왕국이 올 것을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붉은 짐승과 통상이니, 협상이니, 평화공존이니 해보았던들 이것은 인위적인 평화이므로 인위적으로 끝나고 말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 기독교 신자는 인위적인 평화에 끌려서 사상을 빼앗기지 말고, 그리스도의 심판과 평화 왕국을 목적한 다림줄의 진리를 굳게 잡고 그 진리를 통하여 오는 초인간적인 지혜와 지식과 능력과 권세를 받아야 한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이루어지는 평화 왕국에 들어갈 수 있는 완전한 인격을 이루는 일과 완전한 단체를 이루는 일에 목적을 두고 해산의 수고를 다하여 부르짖는 일이 이제부터 더 강하게 일어나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인위적인 평화가 성립된다고 해서 마음을 놓고 방심적인 태도에서 헛꿈을 꾸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된다. 인본주의적인 인격은 인위적인 평화를 목적하는 것이 원칙이겠지만, 하나님의 사람이 되는 그리스도인이 인위적인 평화를 목적한다는 것은 그 인격 자체를 상실하고 마는 일이 된다.
그러므로 기독교인은 그리스도인의 인격으로서 그리스도의 평화 왕국을 목적하고 싸워나가야만 할 것이다. 아무리 붉은 짐승의 세력이 강하게 일어난다 하여도 우리는 이것을 두려워할 것이 아니요, 오히려 하나님을 바라볼 일이 된다. 왜냐하면 성경에 평화 왕국이 이루어지는 심판 날에는 붉은 짐승을 들어서 환난이 오게 하고, 환난 가운데서도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은 천사로 보호하고 붉은 짐승이 두려워서 그 앞에 절을 하고 표를 받는 자는 붉은 짐승과 같이 없애버린다고 말씀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끝까지 하나님을 경외하고 붉은 짐승과 타협하지 않는 사람으로서 세계 평화의 왕국을 이룬다는 것이 성경 전체의 종말관이다. 인위적인 평화가 잠깐 동안 있다는 것이 성서적이요, 인위적인 평화를 꿈꾸던 사람들이 슬퍼한다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이다(사33: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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