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5. 순교자의 호소와 수가 차는 일 - 계6:9~1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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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 론
하나님의 역사라는 것은 사랑하는 종들을 순교하도록 한 것도 비밀이 있고, 끝 날에 수를 채우기를 기다리는 비밀도 있다. 인간이 볼 때는 사랑하는 종들이 억울하게 순교당한 일이 슬픔이 아닐 수 없으나 순교는 사랑하는 종에게 주신 축복이 되는 것이다. 아무래도 죽었다가 부활할 성도들에게 순교의 죽음을 준다는 것은 그 몸이 어떤 병마에 걸려서 죽는 것보다는 영광이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이다. 또한 우리는 그 발자취를 따르는 형제가 되고 동무가 되는 것이 영광이요, 큰 축복이 되는 것이다.
1. 순교자의 영혼들이 왜 호소하느냐에 대한 것을 알아야 한다 (9~10)
(계6:9) 다섯째 인을 떼실 때에 내가 보니 하나님의 말씀과 저희의 가진 증거를 인하여 죽임을 당한 영혼들이 제단 아래 있어
(계6:10) 큰 소리로 불러 가로되 거룩하고 참되신 대주재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심판하여 우리 피를 신원하여 주지 아니하시기를 어느 때까지 하시려나이까 하니
이날까지 모든 선지와 사도와 성도들은 교회를 개척하여 세우기 위하여 어느 국가, 민족 할 것 없이 피를 흘리지 않고는 참된 구원의 복음을 전할 수 없게 되었던 것이다. 왜냐하면 이방신의 종교가 가득하고 이방적인 풍속에 젖어 있고 이방의 정권이 다스리고 있는 그 나라에 전도를 개척할 때 이방적인 종교나 풍속이나 정치에 대한 일을 대항하는 진리가 되기 때문이다.
만일 앞서간 종들이 현실적이어서 어느 나라를 들어가든지 피 흘리지 않고 그 나라 종교와 타협을 하고 풍속에 속화되고 그 나라 정치의 압박을 받지 않으려고 무조건 타협하는 종들이었다면 우리는 참된 구원의 복음을 바로 받을 수가 없었을 것이다. 신앙은 세상을 이기는 것이 신앙이라고 요일5:4에 말했던 것이다. 신앙이란 타협이라는 게 있을 수 없기 때문에 수많은 종들이 피를 흘렸던 것이다.
그런데 심판기가 오는 말기에 교회가 극도로 부패해서 타협과 세속적으로 흐르는 동시에 참된 종들의 신앙 사상과는 거리가 먼 개포도 같은 자리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속히 핏값을 갚아 주는 역사가 일어나야만 된다는 것이다.
2. 수가 차는 일 (11)
(계6:11) 각각 저희에게 흰 두루마기를 주시며 가라사대 아직 잠시 동안 쉬되 저희 동무 종들과 형제들도 자기처럼 죽임을 받아 그 수가 차기까지 하라 하시더라
핏값을 갚아 줄 책임은 주님께 있다. 왜냐하면 당신의 십자가와 부활을 바로 전하기 위해서 흘린 피니 그 피를 무효로 돌린다는 것은 공의가 아니다. 만일 금일의 타협적인 신앙 노선을 그대로 둔다면 그들의 피는 억울한 호소를 아니할 수 없는 일이다. 지금 교계는 백말에서 시작된 교회가 백마적인 사상에서 청황색 말의 사상으로 변해지는 때가 되기 때문에 이러한 심판이 나리는 때의 역사가 일어나기 전에는 도저히 어찌할 수 없는 환경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잠시만 기다리라는 뜻으로 순교자에게 흰옷을 준 것은 내가 너희를 신부의 자격으로 인정한다는 뜻이다.
이제 주님께서 앞서간 선지들의 피를 인정하신다면 그 피의 발자취를 따르는 형제와 동무되는 종들의 수가 차기를 기다리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제는 하나님께서 말세의 심판권을 새로 받고 나갈 종들의 수를 채우는 기간은 잠깐 동안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여기에 죽음을 당한다는 것은 말세의 종들로 자기 사명을 지켜 끝까지 나가는 자는 순교의 반열에 드는 산 순교인 것을 말하고 있다. 주님께서 ‘자기처럼’이라고 말씀하신 것은 주님이 썩지 않고 죽었다가 삼일 만에 부활함같이 말세의 남은 종들도 순교의 생활에서 주님을 맞이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수라는 것은 14만 4천 명의 수가 찬다는 것이나 같은 뜻이다. 아직까지 심판의 역사가 나리지 않는 것은 그 수가 차기를 기다리는 잠시라는 기간이다.
이제 시련기를 거쳐서 환난기에 남은 종은 자체를 죽이고 나가는 순교적인 생활이 있어야 된다는 것을 가르친 것이다. 세밀히 말하자면 앞서간 종들도 십자가와 부활을 증거하기 위하여 순교했다면 종말에 남은 종은 예언의 말씀을 받고 증거하기 위하여 순교적인 생활에서 승리하여야만 될 것이다.
결 론
순교자의 호소의 원한이 이루어지는 강권 역사는 말세의 수가 차는 역사로 종말을 짓는 것이니, 잠시 동안에 수가 차는 일은 그들의 소원이 이루어지는 강권 발동의 강권 역사가 나리기 때문이다(계7:3, 11:3). 다시 말하자면 눅14:23에 나가서 강권하여 데려다가 혼인석을 채우라는 말씀과 동일하다.
종말의 수는 자기의 기도가 부족해도 순교자의 원한이 이루어지는 강권 역사에 끌려서 사명자가 되는 일도 있고 하루아침에 자기 인간성이 죽는 강권 역사도 있을 것이다(슥3:9). 하나님은 무소불능하신 신이신 동시에 사랑의 신이시니 자기가 예정한 수는 어떻게 하든지 채우고야 만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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